(저번주에서 이어집니다.)
그렇게 어떻게 견뎌내다 보니 이제 스키스시를 넘겨받게 되는 순간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이제 감동적으로 ‘하나님이 하셨어’라고 얘기를 마무리 하려면, 그래도 억만장자가 되지는 않더라도 저렇게 잔액이 빈털터리가 되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 이제 기가 막히게 처음에 가게를 하면서 꽤 오랜 시간 동안 저는 마어너스라는 세상을 접하게 됩니다. 어쩌면 저 당시보다 더 아래로 내려가게 되는 것이죠.
이때 들었던 의문이 그거였습니다. ‘하나님 내가 돈이 없어서 생활이 힘들다’고 느끼면, 하나님께 ‘왜 돈 안 주세요’ 칭얼거리지 않고 그냥 당연하게 알바를 더 늘렸습니다. 그게 부족하다고 느끼면 또 더 늘렸습니다. 그게 제 나름대로 나의 삶의 책임을 지고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물며 가게를 운영하는 자리까지 왔는데 이제는 좀 이 허덕거림에서 벗어나야 되지 않겠습니까? 알바 1개에서 2개, 2개에서 3개, 그러다가 결국에는 가게를 아예 운영하는 자리까지 오게 되었는데 왜 나아지지는 못할망정 더 나빠지기만 하는 겁니까? 나름 나의 위치는 올라가는데 왜 상황은 더 내려가야만 하는 걸까요?’
이 질문의 대답들은 저도 꽤 오랜 시간 동안 몰랐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어찌 보면 정확한 대답을 알고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요셉이 오늘 본문 말씀 45장에 형들에게 했던 말을 묵상하며 이러한 힘들었던 순간들도 하나님의 은혜구나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되는 계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2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 요셉은 파라오, 바로의 꿈을 해몽하게 되어주는 기회를 가지게 됩니다. 41장 25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요셉이 바로에게 말하였다. 임금님께서 두번 꾸신 꿈의 내용은 다 같은 것입니다. 임금님께서 장차 하셔야 할 일을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어떻게 보면 이전의 상황과 비슷합니다. 하나님이 해몽의 능력을 주신 것처럼 바로에게 그 꿈을 꾸게 한 것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의 꿈을 해몽한 후에 요셉의 행동입니다. 요셉은 한 나라의 왕의 꿈을 해석하여 줍니다. 그러면 이전의 있었던 상황보다 어찌 보면 지금 이 순간이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고의 기회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바로에게 내가 꿈을 해몽하여 주었으니 나를 꺼내주세요, 상을 주세요, 이렇게 얘기하지 않거니와 기대하는 모습조차 성경에서는 보여주지 않습니다. 이때 요셉의 마음에는 나를 이 상황에서 건져내 주시는 분은 나의 눈앞에 있는 저 왕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라는것을 깨달은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알다시피 바로는 요셉을 이집트의 총리로 세우게 됩니다.
감옥에서 2년이라는 시간 동안 하나님께 드렸던 시간이 요셉의 가치관을 바꾼것이 아닐까 저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하시는 거구나. 지금까지 내가 누려올 수 있었던 것들이 내가 잘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허락하심이었구나.’ 이 가치관의 차이가 주는 두 가지의 유익을 오늘 저는 이 시간을 통해 여러분에게 나누고 싶습니다.
본문 말씀 45장의 상황은 요셉이 이제 형들에게 자기 자신을 밝히는 상황인 것입니다. 45장 말씀입니다. “이리 가까이 오십시오. 하고 요셉이 형제들에게 말하니, 그제야 그들이 요셉앞으로 다가왔다. 내가,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넘긴 그 아우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책하지도 마십시오. 형님들이 나를 이곳에 팔아넘기긴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요셉은 단순히 형들에게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은 자기를 죽이려고 했었던 사람들을 용서해줄 뿐만이 아닌,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나누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의 젊은 시절에 그 모든 고난의 이유는 형들의 질투 때문이었는데, 요셉은 형들을 탓하지 않을뿐더러 그들에게 복수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먼저 보내셔서 준비하게 하신 거라고, 그리고 이 모든 역사하심은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이라고 요셉은 고백합니다.
이 고백을 묵상하며 깨달은 하나님이 주신 한가지의 유익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때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을 더 가치 있게, 또 유익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시야가 넓어지게 되고, 마음은 간사해지지 않을뿐더러, 생각하지 못하였던 곳에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돈 때문에 가족을 죽이기도 하며,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남을 버리고, 배반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요셉의 때와 별반 다를게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싫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돈을 쓸 수 있나요? 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아무리 내가 남을 사주는 걸 좋아하더라도 내가 싫어하는 사람에게만큼은 돈을 정말 쓰고 싶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내가 지금 누리는 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라면, 그것은 당연하게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쓰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내가 싫어하는 사람에게 밥을 사주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그리고 단순히 재물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 나에게 주어진 시간, 권력, 재능, 재물, 혹은 건강한 육체를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있는 곳에 쓰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게 내 것이라고, 내가 이루어 낸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다면, 이건 쉽사리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또한 생각이 듭니다. 내가 누릴 수 있는 게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마음을 품게 되는 순간 내가 가진 것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음식을 할 때 손이 많이 크기에 음식이 많이 남습니다. 어떻게 보면 양을 조절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양을 조절하는 능력을 저에게서 뺏어가신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많은 음식을 하거나 재료를 사 오면 꼭 따라 오는 게 있습니다. 잔소리 폭탄들입니다. 이리 피하면 저쪽에서 하고, 저리 피하면 이쪽에서 하시면서, ‘도대체 왜 그러냐고, 힘들다고, 사서 고생 좀 하지 말라고’ 말들 하십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 음식들을 포장하고 쌓여져 있는 몇십 개 되는 용기들을 보고 있을 때 저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예전에는 나 한 명 먹을 밥상도 차리기 힘들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전달할 수 있네요.‘ 그리고 저는 이러한 방식들이 지금의 나에게 주신 것들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