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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30:8 / 사무엘하 5:19
다윗은 사울과 가장 다른 것이 주님께 항상 묻고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블레셋에 피신에 있는 작은 자였을 때나 유대와 이스라엘의 왕이 된 때나 그는 항상 주님의 뜻을 묻고 의지합니다. 이 구절이 오늘 설교 말씀과 같았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셔서 우리를 이끌어 주시고 승리하게 해주시기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내 안에 주님이 계신 것을 의식하고 주님께 묻고 대화하며 말씀을 귀담아듣는 훈련을 해보라고 하셨는데 바로 다윗이 그렇게 한 것 같습니다. 자신이 힘이 있으나 없으나 언제나 전쟁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그 뜻을 따랐기에 그는 하나님이 기억하고 복 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님 이거 어떻게 할까요?” 하며 주님 앞에 묻고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자가 되기 원합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이 나를 인도하시고 이끌어 주실 때 고집 피우지 않고요.
사사기 14:6, 19 / 15:14
삼손이 큰 힘을 발휘할 때마다 공통으로 나오는 문장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임하시니” 입니다. 삼손의 힘의 근원은 종교적 율례 때문에 기르고 있던 머리카락이라기보다는 삼손 인생의 주인이셨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것을 망각하는 순간 그는 나약한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나의 공로를 내세워 하나님께 복을 받고 있다 착각하는 실수를 범하지 말고 항상 나의 주인이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의 도우심과 지혜를 구할 때 진정한 힘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사무엘상 15장
22절에 보면 “사무엘이 나무랐다. “주님께서 어느 것을 더 좋아하시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번제나 화목제를 드리는 것이겠습니까? 잘 들으십시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삶에서 순종을 위해 씨름하고 고민했던 적이 얼마나 있었나 반성해봅니다.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고 내 편의를 위해서만 하나님을 찾았던 수많은 시간을 회개합니다. 말씀의 실천이 기본이 되는 신앙인으로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자녀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민수기 13장
정탐군들의 현실적인 혹은 객관적인 보고는 이미 그 땅을 주기로 약속하신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었고 그로 인한 결과로 그들은 악한 세대로서 하나도 약속의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문득 광야에서 죽은 그들은 끝날까지 출애굽 한 것을 후회했을 수도 있었겠다 싶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지 못한 결과가 참 어마 무시합니다. 믿는 자로서 그러나 여전히 불신하는 자로서… 두려움이 생깁니다. 믿음의 눈으로 감사하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해야겠습니다.
사무엘상 15장
하나님께서 사울을 세우신 것을 후회하셨다는 말씀이 안타깝게 느껴졌고, 또한 사울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영이 떠나자 악한 영이 들어왔다는 말씀에 두려움도 느껴집니다. 내가 한번 만난 하나님으로 나의 믿음 생활이 무탈히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이쁜 삶을 살도록 발버둥쳐야겠습니다. 가만히 되는대로 살면… 그냥 나 자신으로 살면 하나님이 후회하실지도 모르니까요;;
창세기 17장
묵상을 나누기 위하여 중간중간 쉬고 메모하며 들으니 더 말씀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여러 메모 중 17장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복을 주어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라고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시는데, 엎드려 듣고있던 아브라함이 웃으며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합니다.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도, 그것도 엎드려 직접 약속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하나님의 뜻과 능력보다 현실을 이성적으로 보고 판단한 것이라 생각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계시고 계획하심이 있음을 믿으면서도 현실을 보며 알량한 내 이성이 자꾸만 앞서감을 이해가 되어 잠시 나에게 너그러워집니다^^
그러나 그 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바로 순종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계신다면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가능하게 하심을 믿을 수 있는 믿음, 무엇이 그분의 뜻인지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하고 싶습니다.
창세기 27-33장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를 볼 때마다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과 인간적인 사람의 차이를 실감합니다. 하지만 사실 아직 나는 에서의 마음과 행동이 더 이해가 가고 공감이 됩니다. 후에 돌아온 야곱을 용서하고 함께하는 모습이 참 인간적으로 선하고 훌륭히 여겨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택한 사람은 야곱이었습니다. 때론 비열해 보이기까지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복을 향한 끈질긴 그 마음을 하나님은 더 기뻐하심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엿본 것만 같습니다^^
– 창세기 50:20
요셉의 인생 여정을 살펴보면 참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의 삶은 그야말로 얽히고 꼬인 인생, 세상 억울한 인생처럼 보입니다. 남들은 다 평탄한 삶을 사는 것 같은데 나에게만 왜 이런 고난과 시련이 닥치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러한 시련과 고난이 없었다면 과연 요셉이 애굽의 훌륭한 국무총리가 되어 7년의 기근 동안에 굶주림 없이 애굽을 통치할 수 있었으며 더 나아가 이스라엘 자기 형제들의 생명도 구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 야곱의 편애와 꿈 자랑에 푹 빠져 자기만 알고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평생 이스라엘에서 살다가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생각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고난과 시련을 겪으면서 요셉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릇으로 더 견고하고 단단하게 그리고 겸손한 종으로 세워져 갔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통하여 함께 동행하시며 범사에 형통케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함으로 본인뿐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심을 증거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시편 119:71
올해 사모님이 보내주신 링크에서 받은 말씀입니다. 사실 새해 첫날 이 말씀을 받고 기분이 썩 좋지 않았었습니다. “하나님, 왜 새해 첫날부터 고난받는 말씀인가요? 지금까지 받은 고난도 만만치 않았는데 이제 그만 받으면 안 될까요? 물론 뒷부분에 율례를 가르치신다고는 하셨지만… 제가 어쩌다 잘못 고른 거겠죠? 올 한 해 또 어떤 고난이 닥쳐올까 생각하니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고 애써 피하고만 싶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네요…. 유익한 고난을 통해 나에게 주의 율례를 가르치시고 하나님의 일꾼으로 견고히 세워 가시며, 지금은 이해할 수 없지만, 요셉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과 늘 동행하는 삶을 살고자 할 때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사 나의 삶을 늘 형통케 하시고 더 나아가 하나님 나라가 이 땅 위에 이루어지게 하시길 원하신다고요…
시편 40절
이 말씀을 읽는 도중 20년도 훨씬 전에 즐겨 불렀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기도하면’ 이라는 찬양이 생각났습니다… 그 시절 아무것도 모르고 흥얼흥얼 불렀던 이 시편의 노랫가락이 오늘은 제 마음에 깊게 와닿는 것 같습니다. 하고 싶은 것도 이루고 싶은 꿈도 많았던 의욕 넘치던 20대 시절, 하나님은 가끔 기도를 들어주시기는 하지만 그저 멀게만 느껴지시는 분이었습니다. 때로는 열심히 기도했지만 내 뜻대로 응답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왜… 왜… 왜…. 이루어지지 않냐고 내 머리로 이해할 수 없음에 불평, 불만으로 가득 차 있던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이후로 어느덧 2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이 찬양을 다시 부르니 그간 내 삶의 굽이 굽이마다 하나님께서 친히 간섭하시어 이 말씀대로 살게 하셨음에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감사의 찬양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시절에 느꼈던 거룩하고 공의로우신, 멀게만 느껴졌던 하나님이 이제는 어느새 나와 늘 함께하시고 가까이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시는 나의 아버지가 되셨음을 깨달았습니다.